당신들이 서 있는 곳은 ‘그가 끝난 곳’인가?

“나의 실패를 진보의 좌절, 민주주의의 좌절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사고는 역사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여러분은 여러분의 갈 길을 가야 한다. 몽땅 덮어씌우는 태도도 옳은 것은 아니지만 노무현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는 것도 극복해야 할 자세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할 일이 있고, 역사는 자기의 길이 있다.”([성공과 좌절] 17쪽)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두 해를 맞았다. 곳곳에서 추모행사가 진행 중이고 언론들은 다시금 ‘친노의 재구성’이라는 퍼즐맞추기에 재미를 보이고 있다. 2009년 5월, 그의 서거는 MB정권의 1기와 2기를 구분하는 기준점이 되었다. 그 전까지는 2008년 한 해를 달구었던 촛불 집회의 여진이 짙게 드리워지고 그동안 비정치적인 영역에 있었던 생활의제들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반면 2009년 5월 이후는 전면화된 생활정치의 담론이 급격하게 현정권과 ‘상징적’으로 대치하는 민주정부의 재발견으로 넘어가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정치사회학에서 언급하는 동원 이후의 제도화 과정이라고 해석한다면 일종의 정상적인 수순을 밟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현재의 큰 부조리에 맞서는 작은 부조리의 정당화로 등장한다면 일종의 퇴보라고도 봄직하다. 이후 친노정당을 표방한 국민참여당의 등장은 일정 정도 동원의 제도화라는 수준과 부분적인 퇴보로서의 이전 정권 정당화가 결합된 가장 구체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서두에 언급한 글은, 노무현 대통령이 생전 가장 마지막에 남긴 글의 내용에서 추린 것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뚜렷하다. 탈 노무현으로서 진보의 갈 길을 만들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특히나 과거 정권의 적자라 할 만한 전임 고위공직자들이 노무현의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노무현의 복권과 동시에 본인들의 정치적 복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닌가. 이 글은 노무현의 죽음 이후 친노 그룹 등에서 나온 책들에 대한 서평을 빌어 이를 탐색하기 위해 쓰였다.

2009년 5월 서거 이후, 가장 눈에 띄는 출판의 경향은 도종환 시인의 [노무현이, 없다](학고재, 2010) 류의 애도와 추도를 담은 글들과 김대호 사회디자인 연구소장의 [노무현 이후]류의 정치담론 서적, 그리고 구 참여정부 인사들이 작성한 참여정부 변론서 류의 책들로 구분될 수 있다.

이 중 세번째 경향의 책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참여정부 국정홍보처에서 일했던 이백만의 [불멸의 희망](21세기북스,2009)이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통상의 참여정부 변론서에서는 참여정부의 주요 쟁점 중 한미 FTA와 같은 것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있으나 이 책에서는 이에 대한 당시 정부의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한미FTA는 세계화 바람의 소산이다. 세계화는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 이념을 담고 있다. 미국은 세계화의 진원지다.”(223쪽)

즉, FTA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며 당연히 그것이 내장하는 신자유주의를 수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미국이었을까? 정례적인 통상 마찰 대신 차라리 FTA를 하자는 것(225쪽)이 당시의 이유였다. 흥미로운 것은 참여정부 내내 말해왔던 ‘개방 대 쇄국’의 논리 대신 미국의 통상압력에 따른 대응책으로 한미FTA를 추진했다는 점이다. 아쉽게도 그동안 통상압력의 주요 부분이었던 ‘영화’ 부분을 선결조건으로 내준 것에 대한 평가는 없다. 그러면서도 한미FTA는 세계화의 흐름이었다고 강변한다. 이런 상대에게 FTA가 자유무역이냐고 묻는 것이나, 투자자 제소권의 주권 침해 논란을 문제시하는 것은 참 어처구니 없는 질문이었겠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백만의 글은 여기서 좀 더 나간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 책을 통틀어서 단 한번의 실책도 없는 무오류의 국정운영 신화를 보여주는 데 열심이다. 그래서,

“신기한 일은 이런 언론 환경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 추진했던 주요 정책의 지지율은 60% 수준에 달했다. … 종부세 신설, 부동산 과표 현실화, 신행정수도 건설, 지역혁신도시 건설, 3불정책, 국가보안법 폐지 추진, 작전통제권 환수, 이라크 파병, 한미FTA, 대북정책, 방폐장 건설 등등.”(436쪽)

이라는 결론으로 치닫는다. 참여정부 인사들의 ‘언론탓’은 숫제 관용어 수준이니 논외로 하자. 게다가 앞에서 열거한 내용에 ‘대연정 제안’ 이니, ‘새만금 골프장’, ‘기업도시’ 등과 같은 정책의 지지율을 들어 이것은 왜 뺐냐고 항의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들만 추려도 된다. 국가보안법이 살아남았고, 이라크 파병이 살아남았으며, 한미 FTA와 방폐장이 살아남았다. 우리가 그렇게 부정하려고 하는 MB정부와 참여정부의 교집합이 이 정도라면 도대체 참여정부에 기대어 MB정부를 비판할 정책의 내용이란 것이 도대체 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참여정부를 제대로 평가하는 일은 두 가지 작업이 축적되어야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는 지표 등을 통해 정책의 성격을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 다른 하나는 참여정부가 무엇을 하려고 했었는지 정책의 의도를 확인하는 것입니다.”(6~7쪽, 추천의 글)이라는 문재인의 글은 시사적이다. 지표와 의도를 가지고 참여정부를 평가하자는 제안은 그대로 참여정부 인사들이 MB정부 하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유력한 알리바이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한 이라크 파병과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한 이라크 파병이 도대체 어떻게 현실에서 다를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추진한 방폐장 추진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정책의 평가는 지표외의 요소들도 그만큼 중요하며, 특히 정책의 의도보다는 정책의 결과가 평가의 기준일 수 밖에 없다.

노무현은 그의 글에서 양극화 문제에 그토록 가슴 아파했음에도, 일군의 친노인사들이 실현되지도 않은 ‘복지비전 2030’을 가지고 정책의 ‘의도’를 상찬하는 것은 솔직히 낯부끄럽다.

이백만의 책과 비교해 볼 수 있는 책이 참여정부 대통령 비서실에서 펴낸 [노무현, 한국정치 이의 있습니다](역사비평사, 2009)인데, 이 책은 200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나온 [한국정치, 이대로는 안 된다](역사비평사, 2007)의 개정판이다. 노무현의 죽음이 아니라면, 개정판 출간년수가 빠르지 않았을 이 책은, 이백만의 책이 참여정부의 주요한 정책 흐름을 다룬 백서류의 책이라면, ‘민주주의의 진보와 한국정치’, ‘불관용과 대결의 한국정치’, ‘지역 구도와 한국정치’, ‘책임정치를 위하여’라는 장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 영역에 한정된 내용을 담고 있다. 정확하게 보면, 대통령 노무현의 정치행보에 대한 알리바이를 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2009년 판과 2007년 판에 큰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표방했던 제한적 대통령제와 관련된 내용이다. ‘한국, 더 이상 강력한 대통령제 국가 아니다’라는 부분을 빼기로 했다면서, “최고 권력자의 국정철학과 통치 스타일에 의해 제왕적 대통령의 구습이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는 요즘 이 부분을 삭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13쪽)이라고 언급한다.

이런 기준이 아니라면, 이 책에서 빼야될 부분이 몇 가지 더 되지만 이것만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이백만의 책과 연관해서 보자면, 참여정부를 다루는 사후의 책들은 당시의 정책 담당자들이 썼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노무현’이라는 CPU로 작동하는 ‘인치의 부속물’에 불과했다는 인상을 남긴다는 점이 그렇다.

2009년 노무현의 죽음 이후, 소위 친노그룹은 ‘노무현이 없으면 운영조차 안 되었을 참여 정부의 맨 얼굴’을 알리기에 정신이 없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이지 않는’ 제왕적 대통령으로 불러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특히 2009년 책에 써서 붙인 천호선 당시 홍보수석은 “노무현 대통령은 대의를 이루기 위해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먼저 던졌습니다.”(254쪽)라고 말하면서, 측근의 부패사건에 대해서 대통령직을 걸고 재신임을 물었던 일, 대연정을 제안하면서 권력의 절반을 내놓겠다고 한 일, 개헌을 위해서라면 임기의 반을 포기하겠다고 한 일에 이어,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던졌다는 점을 사례로 제시한다.

글쎄, 이런 글이 인간으로서의 노무현은 모르겠지만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을 다시 세우는 데 도움이 될런지 잘 모르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에서 나온 글들 외에 가장 참여정부의 적극적인 계승을 주장하는 책을 꼽으라면 단연코 김대호의 [노무현 이후](한걸음더, 2009)다. 물론 주관적인 기준이기는 하지만, 참여정부에서 추진하고자 했던 정책의 ‘결과’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이에 대한 발전을 주장하고 있으며 바로 참여정부가 끝난 그 부분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김대호는 “참여정부가 내세운 제도적 성과는 한미FTA와 행정복합도시를 제외하면 대중들의 외리에 인상 깊게 남을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195쪽)고 냉정하게 지적한다. 그래서 “실제로 도덕적이었고 도덕적 신뢰를 특별히 강조했고 인간적으로 훌룡한 사람들 많이 썼고, 뭔가 획기적인 전환을 해보려고 했으나 뚜렷하게 이뤄놓은 것이 없는 정부"(196쪽)라는 것이다.

이 책은 구체적인 대상이 있는데, 그것은 참여정부의 입장에 서서 참여정부를 공격했던 진보진영이 그것이다. 한국 사회를 노동과 자본의 대립으로 파악하고 참여정부에게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붙여 비판했던 진보진영의 주요한 논점을 적극적으로 회피하면서 다른 정책 프레임을 제기하고자 한다. 요즘에 ‘공평국가론’이라고 회자되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정책적 족보를 따져보면 영미식의 ‘제3의 길’에 대한 한국적 버전이라고 할 법하다.

김대호는 참여정부가 남긴 숙제(209~210쪽)로 개헌문제, 국회의 중요성, 탄핵, 선출되지 않는 권력으로서 대기업, 언론 문제, 정당과 정치생태계의 문제, 진보의 분열을 이념과 정책의 자산으로 삼는 문제 등 6가지를 꼽는다. 그러면서 그동안 진보진영에서 써온 양극화 문제를 참여정부가 그대로 사용한 것은 문제라며, 이를 빈곤해소라고 적극적으로 바꾸어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빈곤해소과정에서 양극화는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 아니냐(312쪽)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버리고 오히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문제 등 내부적인 공정성과 공평성 문제에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316~317쪽)한다.

사실 이런 입장이 참여정부에서 보여주었던 도덕성의 속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런 관점의 변경이 실제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즉, 빈곤해소와 양극화는 전혀 다른 문제틀이며 신자유주의 자체가 대기업 중심주의의 정책적 결과일 수 있다는 개연성을 무시하는 것) 정직하지 못한 변론임에는 틀림없다.

이런 입장은 참여정부의 어떤 인사보다 조기숙의 [마법에 걸린 나라](지식공작소,2007)와 근친성을 갖는다. 조기숙은 참여정부를 ‘너무 성공해서 슬픈 정부’라고 칭하는데, 이의 근거라곤 ‘매일경제’에서 연재한 ‘정치경쟁력 강화를 위한 제안’의 주요 항목을 거의 전부 이행했기 때문이라는 점 뿐이다.

[마법에 걸린 나라]에서 밝히는 참여정부의 ‘실패’ 이유는 단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조중동으로 표현되는 언론의 프레임에 갖혀 버린 것이고, 진보를 가장한 좌파들의 무책임한 비판이 두 번째다. 이 책을 통해 조기숙은 참여정부의 이념적 지향을 ‘진보우파’로 특정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진보는 곧 좌파’라는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진보세력이 좌파와 확실하게 결별하는 방법은 보다 확실하게 진보적 색채를 띠는 것이다. 좌파가 진보와 일정부분 협조하지 않을 수 없도록 진보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교육제도, 개인의 인권을 보호하는 복지 정책의 강화를 통해 진보세력은 좌파와 결별해야 한다.”(274쪽)

이런 진보의 전략은 구진보와 차별화를 추진하는 영미식 ‘제3의 길’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으로, 김대호의 ‘양극화와 신자유주의 버리기’ 제안과 일맥 상통한다. 그래서 이들은 앞서 언급한 어떤 참여정부 인사보다 솔직하다.

“우파는 전 국민에게 일률적인 복지를 실시하기보다는 국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최저계층에 집중한다. …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 참여정부의 비전 2030은 우파의 철학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272쪽)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마지막까지 쓴 글을 모아 출판한 [성공과 좌절](학고재,2009)은 “실패한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16쪽)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거리두기를 통해서 인간 노무현의 정치적 비전을 다시 세우려고 했던 솔직함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죽음 이후 쏟아진 그에 대한 책들은 그가 말한 ‘실패’에서 출발하지 않고, 모두 ‘성공담’과 ‘영웅담’으로 치우쳐 있는 것에 슬픔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더구나 대통령을 바꾸면 새로운 세상을 열릴 것처럼 말하는 작금의 정치환경이, 또 다른 대통령을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참여정부는 스스로의 가치에 기대어 볼 때 실패했다. 지난 5년간의 참여정부 기간이 진공관에 넣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 앞의 역사와 그 이후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각자가 선 자리에서 노무현의 끝을 이어가면 그만이다. 좋든 싫든 이명박 시대는 그 끝에서 시작한 하나의 길이다.

그나마 볼 만한 책들이 2010년에는 찾아 볼 수 없게 된 것이, 노무현의 지체된 ‘실패담’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