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맛 – ‘바람난 가족’의 재벌판 혹은 ‘하인’

※ 영화 ‘돈의 맛’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윤회장(백윤식 분)의 비서 영작(김강우 분)은 윤회장의 부인 금옥(윤여정 분)과 강제로 동침하지만 정작 그녀의 딸인 이혼녀 나미(김효진 분)에게 끌립니다. 평생 바람둥이였던 윤회장은 가정부 에바(마우이 테일러 분)와 함께 가출하고 가문은 발칵 뒤집어집니다.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은 전작 ‘하녀’의 속편 격에 해당하는 영화입니다. ‘돈의 맛’에 등장하는 재벌 가문의 딸 나미의 이름은 ‘하녀’에서 주인공 은이(전도연 분)가 잠시 키우던 재벌 가문의 딸 나미의 이름과 동일합니다. ‘하녀’의 나미가 자라 ‘돈의 맛’의 나미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돈의 맛’에서 나미는 ‘어린 시절 불에 타 죽은 하녀’를 언급합니다. (나미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녀’에서는 해라였으며 ‘돈의 맛’은 금옥으로 다릅니다.) 극중에서 나미가 ‘하녀’를 관람하는 장면이 제시되며 1960년 작 김기영 감독의 오리지널 ‘하녀’ 또한 활용됩니다.

윤회장 가문의 가족 중에서 가장 제 정신에 가까운 사람이 나미인 것은 어린 시절 하녀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보헤미안의 기질을 지닌 아버지 윤회장과 닮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극중에서 윤회장 가족은 윤회장과 딸 나미가 다소 간의 양심을 지녔다는 점에서 닮았으며 노 회장(권병길 분)과 금옥, 그리고 금옥의 아들 철(온주완 분)이 양심과는 거리가 먼 스테레오 타입의 재벌가 인물이라는 점에서 닮아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하지만 ‘하녀’와 ‘돈의 맛’은 미묘하게 다릅니다. ‘하녀’는 재벌 가문에 의해 희생되는 하녀, 즉 일반인 여성에 초점을 맞췄다면 ‘돈의 맛’은 재벌 가문 자체가 붕괴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따라서 ‘돈의 맛’의 전반적인 서사 구조는 ‘하녀’보다는 ‘바람난 가족’에 가깝습니다.

‘하녀’의 하녀 은이에 대비되는 ‘하인’이 바로 ‘돈의 맛’의 주인공 영작인데 그의 운명은 뻔히 예상할 수 있는 비극으로 귀결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운신의 폭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전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 희극도, 비극도 아닌 결말은 씁쓸한 웃음을 자아냅니다. 대신 희생되는 하녀는 필리핀 여성, 즉 외국인 노동자의 몫입니다. ‘하녀’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대한 인식을 ‘돈의 맛’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제목부터 돌직구인 ‘돈의 맛’은 매우 직선적인 영화입니다. 생명을 경시하며, 금전으로 인한 결탁을 넘어 권력을 조종하고, 성적으로 타락했으며, 엘리트 의식으로 똘똘 뭉쳐진 재벌 가문의 허위와 위선을 고발해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재벌의 삶이란 고통스럽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돈 걱정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서민들과 다를 바 없이 부대끼며 진흙탕에서 살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재벌을 선망할 필요는 없다는 주제 의식 속에는 당연히 재벌에 대한 조롱이 담겨 있습니다. 극중에서 재벌 가문 사람들이 입에 담는 대사 또한 일반인과 달리 문어적이면서도 민망할 정도로 직선적입니다.

재벌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듯 화려한 세트와 의상이 돋보이며 실내 장면이 많아 연극적입니다. 화려한 세트 속에서 비싼 옷을 걸친 극중 인물들의 내면은 공허하기에 ‘돈의 맛’은 부조리극이자 코미디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작과 금옥의 섹스 장면은 충격적일 수도 있지만 우습기도 합니다. 영작의 존재로 인해 가문 내에서 가장 적은 비중을 부여받는 윤회장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철과 영작의 어이없는 격투 장면과 뒤 이은 롱 테이크는 웃음을 유발합니다. 영화평론가 달시 파켓은 한국어와 영어를 뒤섞어 말하는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등장합니다. 아버지가 하녀와 놀아나고 비서가 모녀와 삼각관계를 이룬다는 점에서 막장 드라마의 요소 또한 지니고 있습니다.

고어 및 섹스 장면이 등장하는데 수위는 높지 않지만 불쾌감을 자아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관객이 불편해 하는 것이 임상수 감독의 연출 의도라 할 수 있습니다. 김효진의 노출을 기대했다면 실망스러울 것입니다. 노출은 김효진 대신 마우이 테일러와 이름 없는 엑스트라들의 몫입니다.

‘돈의 맛’의 약점은 두 남성 캐릭터입니다. 일본적인 냄새가 나는 이름의 주인공 영작은 재벌 가문 속에서 갈등하는 서민으로 묘사되며 재벌과 각을 세워야 갈등이 극대화되었겠지만 그가 과묵한 인물이라는 사실과 무관하게 관객들조차 내면을 알 수 없습니다. ‘일터’인 재벌 가문 외에 그의 가족 및 친구 관계를 비롯한 사생활은 어떤 것이며 비자금을 숨겨 둔 그의 개인적인 공간은 어디인지 명확히 연출하지 않아 애매모호한 인물로 남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가진 소시민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면 관객의 공감을 보다 강하게 이끌었을 것입니다. 근육질의 배우 김강우의 연기의 한계라기보다 임상수 감독이 직접 집필한 각본의 한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재벌 가문 붕괴의 단초를 제공하는 윤회장의 선택 또한 의문이 남습니다. 평생 재벌 가문에서 누릴 것을 모두 누리며 무수한 여자들과 바람을 피운 사람이 필리핀 가정부 때문에 가문으로부터 등을 돌리며 평생 누린 돈을 비롯한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윤회장은 ‘모욕’이라는 단어를 선택하며 평생 쌓인 불만이 터진 것이라 언급하지만 그 불만이 터지게 된 계기는 본격적이라 하기 어려워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백윤식은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윤회장을 강렬하며 입체적인 캐릭터로 형상화하지만 보헤미안 기질을 공적으로도 노출하는 재벌 회장이라는 캐릭터는 매우 허구적입니다. 차라리 윤회장과 금옥이 필리핀 가정부가 아니라 돈이나 권력의 문제로 갈등을 벌이는 편이 보다 설득력을 지녔을 것입니다.

결말에서 관 속의 호러 장면은 임상수 감독의 초현실적 장난기라고도 할 수 있지만 관 속에 거액의 현금 다발을 넣고 공항 세관을 통과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지도 의문입니다.

눈요깃거리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과 서사 구조의 개연성에 의문이 남는 ‘돈의 맛’은 화젯거리는 될 만하지만 흥행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영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investing : 영화 평론가. 블로그 http://tomino.egloos.com/를 운영하고 있다.
영화관의 불꺼지는 순간과 책장을 처음 넘기는 순간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