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록으로 남다, 기억조차 폐기되다

ai주식/주식ai : (4)주공아파트, 재건축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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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오모테산도에 있는 쇼핑몰 오모테산도 힐스는 안도 다다오의 2006년 작품이다. 오모테산도에 들르면 이 건물을 지나지 않기도 어렵다. 하라주쿠역부터 오모테산도역까지 약 1㎞ 이어지는 느티나무 가로수길에 300m가량 접한 긴 건물이 오모테산도 힐스다. 명품으로 유명한 이 거리에서 샤넬로 시작해 크리스찬 디올, 에르메스를 거쳐 루이비통으로 끝나는 여정에 오모테산도 힐스는 길 건너편에서 묵묵히 함께한다. 가로수가 울창한 계절에는 오모테산도 힐스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안도 다다오가 이 건물을 설계하면서 느티나무 가로수보다 높게 지을 수 없다고 고집한 탓이다. 쟁쟁한 럭셔리 브랜드의 각축장에서 오모테산도 힐스는 지금 홀로 키가 작다.

오모테산도 힐스 자리에는 원래 ‘도준카이아오야마’라는 3~4층짜리 낡은 아파트가 있었다. 일본이 간토대지진 후 도쿄를 대대적으로 재건하면서 1927년 지은 건물이다. 지진이 할퀸 자리에 튼튼히 지어야 했기에 집합주택 중에는 일본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조를 썼다. 안도 다다오는 이 아파트를 복합시설로 바꾸는 재건축 프로젝트를 맡았다. 1960년대부터 재건축 시도가 여러 번 무산된 곳이어서 쉽지 않으리라는 점을 안도 다다오는 처음부터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토지주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세 가지 조건을 걸었다. 첫째, 지금 아파트처럼 가로수 높이를 넘지 않을 것. 둘째, 입면을 차분한 느낌으로 디자인할 것. 이것만으로도 이미 부글부글한 토지주들의 마음에 마지막 조건이 마침내 불을 질렀다. 셋째, 아파트 2개 동을 그대로 남길 것.

당시 이미 세계적 건축가 반열에 들었던 안도 다다오에게 불명예스러운 비난이 쏟아졌다. “유행에 뒤처진 건축가!” “안도상은 고집불통!” 3개월마다 토지주, 디벨로퍼와의 껄끄러운 만남이 이어졌다. 안도 다다오는 자서전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첫 회합부터 마지막 회합까지 프로젝트에 대한 나의 방침은 큰 틀에서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 지금까지 아파트가 지켜온 오모테산도의 풍경, 그것은 반드시 남기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1995년 한신대지진을 겪은 아파트는 너무 위험해 부숴야 했다. 대신 안도 다다오는 오모테산도 힐스 한쪽 끝에 아파트 한 동을 완전하게 재현해 덧붙인다. 물론 외관만 주택일 뿐, 내부는 상업공간이다. 바로 옆에 공중화장실이 있어 그 주변에서 발걸음을 늦추면, 멀끔한 쇼핑몰과 이질적으로 붙은 아파트에 눈길이 멈춘다. 20세기 초 아오야마아파트의 기억을 만나는 순간이다.

명품 거리에 남은 1920년대 아파트의 풍경, 우리도 이 전례를 따라서 비슷한 걸 시도한 적 있다. 서울시는 예전에 반포, 잠실, 개포 등지에 지은 아파트 단지를 재건축할 때 옛 아파트를 한두 동씩 남기게 했다. 과거 고속성장 시기에 건설한 주공(한국주택공사)아파트로, 초기 아파트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건축물이라는 이유에서다. 그 시절 아파트에는 연탄 난방에 쓰는 아궁이가 있었고, 남의 집안일을 거들어 생계를 꾸리던 여성들이 머물던 이른바 ‘식모방’이 있었다. 요즘의 벽식 구조 대신 입주자 취향껏 공간 구획을 바꿀 수 있는 기둥식 구조가 많았다. 그래서 반포주공 108동, 개포주공 1단지 15동, 개포주공 4단지 429동과 445동, 잠실주공 523동을 그 역사의 증거로 남기려고 했다.

이 사업을 ‘재건축 흔적남기기’라고 불렀다. 많은 언론이 그냥 예전 5층짜리 주공아파트를 덩그러니 남기는 것처럼 보도했는데, 그렇지 않다. 서울시는 오래된 아파트를 리모델링 등 재생해서 과거 생활상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상가나 커뮤니티 시설로 쓰도록 권고했다. 재건축조합이 이런 흔적남기기를 받아들여 재건축 진도를 빼놓고도 끝까지 손대지 않고 버텼을 뿐이다. 건물은 방치하면 흉물이 된다. ‘흉하니 도로 부숴야 한다’는 논리가 생겨났다. 서울시장이 바뀌고 시정 기조도 바뀌면서 흔적남기기는 모조리 없던 일이 됐다. ‘디에이치퍼스티어아이파크’가 된 개포주공 1단지에는 지난해 말부터 입주가 시작됐는데, 15동이 있던 자리에서는 흔적남기기 사업을 대체할 공원 조성 작업이 뒤늦게 진행 중이다.

일본 유명 쇼핑몰 ‘오모테산도 힐스’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토지주들 설득
기존 낡은 아파트를 ‘기념비’로 재현

서울시도 한때 반포주공·개포주공 등
‘재건축 흔적남기기’ 시도했지만 실패

한국전쟁 이후 부흥의 역사 증언할
독창적 생활유산, 흔적조차 사라져

이렇게 아오야마아파트는 남고, 주공아파트는 남지 못했다. 안도 다다오는 아오야마아파트가 ‘과거를 현재에 전하는 하나의 기념비’라고 했다. 기념비로 칠 것 같으면 주공아파트가 아오야마아파트보다 자격이 부족할 이유가 없다. 아오야마아파트가 간토대지진과 이후 복구의 역사라면, 주공아파트는 한국전쟁과 이후 부흥의 역사를 증언한다. 누군가 아궁이, 식모방, 기둥식 같은 미시적 요소에 코웃음을 친다면, 그 너머의 거시적 집합을 보자고 당부하고 싶다. 그 주공아파트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선망하는 보편적 삶의 시발점이라는 사실 말이다.

거의 평생을 주택 연구에 매진한 고 박철수(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는 최근 출간된 유작 <마포주공아파트>를 “우리는 여전히 ‘마포아파트 체제’ 속에 있다”라는 문장으로 끝맺는다. 마포아파트는 주공이 1965년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 건설한 10개 동, 642가구 아파트를 말한다. 마포주공은 최초의 역사를 여러 장 썼다.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 최초의 분양 아파트, 최초의 재건축 아파트(1994년 마포삼성아파트로 재건축) 등이 마포주공이 뿌린 ‘K주거’의 유전자다. 이 유전자가 널리 퍼져 초중등학교, 대형 상가와 공원까지 품은 3000~4000가구 아파트단지인 반포주공, 잠실주공, 개포주공 등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런 대단지는 더 큰 대단지로 재건축되면서 대단지의 신화를 더욱 탄탄하게 구축한다.

박철수는 이 체제를 말한 것이다. 한국을 연구하는 프랑스 사회학자 발레리 줄레조의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20세기 한국이 만들어낸 가장 독창적인 산물”이라는 평가를 인용하면서 말이다. 연구자와 이방인의 진단에서 긍정 혹은 부정의 가치 판단을 끌어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거다.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인구가 급증한 시기에 조응한 대단지 체제의 출현, 이것은 분명 역사적 특이점이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마포주공을 놓쳤더라도 반포주공·잠실주공·개포주공, 그중 어느 하나라도 붙잡아 기념비를 제대로 남겼어야 했다.

그럼 아오야마아파트는 남고, 주공아파트는 남지 못한 이유는 뭘까. 흔적남기기에 끝까지 어깃장을 놓은 재건축조합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아오야마아파트 토지주들도 오래된 아파트를 남기겠다는 안도 다다오의 발상에 반대했으니까. 자본주의 체제에서 재산권은 헌법상 권리다. 그 권리를 행사하는 일 자체에 시비를 걸기는 어렵다.

다만, 안도 다다오는 토지주 100여명을 상대로 자신의 신념을 4년 동안 고수했고, 끝내 관철했다. 그가 불통했던 건 아니다. 꾸준히 만나고 들으며 신뢰를 쌓았다. 아마 토지주들은 100% 납득하지는 못했더라도 ‘저렇게까지 버티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오모테산도 힐스는 지금도 안도 다다오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그리고 모리빌딩은 안도 다다오와 끝까지 함께하며 결국 오모테산도 힐스를 완성했다. 모리빌딩은 롯폰기 힐스 등 일본의 굵직한 프로젝트를 일군 대형 부동산 개발회사다. 당시 모리빌딩의 대표 모리 미노루는 “개장하면 사람들이 이곳이 미래 문화유산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라며 안도 다다오를 지지했다. 우리 사회에 없는 게 뚝심 있는 건축가만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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