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편의 외주 파행과 안티종편의 논리

우리는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나의 행위(doing)는 어떤 결과(deed)를 낳고, 그 결과는 타인의 행위를 위한 조건이 된다. 행위가 낳은 결과와 그 결과를 조건으로 다시 행위가 이어지는 이 복잡하도 도도한 행위의 사회적 흐름이 한 사회를 유지시키고 발전시킨다. 그러나 행위결과가 행위자로부터 분리될 때, 곧 누군가에 의해 행위결과가 독점적으로 통제되고, 그 통제권으로 인해 또 다른 타인의 행위가 제약 받을 때 계급관계가 형성된다. 이런 행위의 사회적 흐름이 파편화되려면 숱한 투쟁이 있어야 하며, 그 투쟁이 행위와 행위결과의 영속적 분리를 가져오는 사회를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라 부른다.

미디어 또한 사회의 한 부분이기에 제작이라는 생산행위와 그 결과물인 콘텐츠가 영속적으로 분리되는 이 과정을 바로 미디어의 자본화라 부를 수 있다. 콘텐츠를 제작한 이들이 자신의 행위결과를 이후의 또 다른 제작을 위한 조건으로 사용할 수 있을 때, 한 사회의 정신적 자산인 문화 콘텐츠의 사회적 흐름은 더욱 풍성해 질 수 있다. 그러나 제작과 콘텐츠의 분리가 영속화되고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때, 문화의 사회적 흐름은 단속적이 되며 그 문화는 철저히 상품 논리에 종속된 자본주의적 문화가 되고 만다. 이젠 너무도 오랜 시간을 지나온 한국 방송산업의 외주제작은 바로 이런 사회적 흐름의 단절을, 그리하여 한국의 미디어가 얼마나 자본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고 말았다.

종편의 외주 파행을 보는 두 시선

“독립제작사협회 ‘종편채널 횡포 도 넘었다’”(연합뉴스), “외주제작사들 종편 횡포에 항의 성명”(한국일보), “제작사 등쳐먹는 종편 작태 살펴보니…”(프레시안) “‘조중동 종편, 제작비 안주고 횡포’ 외주 독립제작사들 공동성명 발표”(경향신문) “종편과 다시는 일하고 싶지 않지만…”(PD저널). 독립제작사협회가 지난 13일 종편의 파행적인 외주제작 행태를 성토하는 성명서를 내자 일제히 쏟아진 기사들의 헤드라인들이다.

독립제작사협회가 공식 성명까지 내면서 외주제작의 파행을 성토한 것은 드문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번 사태가 종편이 외주제작 방식을 일체 포기하려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현재 종편의 제작 여건상 자체제작으로 감당할 수 있는 편성비율은 50% 수준도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종편이 이후에도 외주제작 콘텐츠를 전부 폐기할 수 없다는 현실적 여건을 염두에 두면, 이번 독립제작사협회의 성명에서는 종편 자체의 열악한 자체 콘텐츠 제작능력과 매체력을 간파하고 이후 계약 협상과정에서 충분한 입지를 확보하려는 의도 또한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출범 초기 위와 같은 파행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존재할 수 있다. 하나는 ‘절대악’ 종편의 숨길 수 없는 철저한 이해타산 논리와 불안한 재정 상태라는 본질이 드러났다고 보는 시선, 즉 종편에 대한 조롱이다. 다른 하나는 지상파 외주에서 벗어나 부역자라는 딱지까지 감수하며 마지막 남은 보루로 택했던 종편에게서 다시 확인한 독립 제작사들의 참담함, 또는 영원한 ‘을’로서의 외주제작의 위상만을 재확인하는 시선이 그것이다. 짧게 말하면, “내 그럴 줄 알았다”이거나, “또 안 되는구나” 두 가지인 셈이다. 이런 시선이 혼재될 때, 위 기사들은 소위 안티종편 진영 내에서 ‘종편에 참여한 독립 제작사들의 순진함’과 나아가 ‘그나마 지상파 외주가 낫지 않은가’라는 논리로 확대될 위험이 다분하다.

독립 제작사의 종편 참여와 안티종편

종편의 외주 파행을 바라보는 느낌은 그래서 다소 복잡하다. 지금의 상황을 보는 시선에서 안티종편, 아니 안티조선의 흔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신문과 같은 문자 텍스트와 달리 오늘날의 방송은 독립 제작사와 프리랜서,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결합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집단적 노동(collective labour)의 산물이다. 여기에 기존 지상파 방송사들이 일종의 암묵적 표준으로 만들어 온 불공정한 계약관계와 제작환경이라는 특수성 또한 존재한다. 결국 종편 참여의 가부는 독립PD 한 명이나 독립제작사 사장의 개인적 결단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아울러 현재의 제작/유통 환경은 콘텐츠의 질이 그것을 편성하는 채널의 질과 등가로 판단될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예컨대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 <아이리스>는 태원엔터테인먼트가 제작한 외주제작물이었다. <아이리스>의 제작사는 애초 지상파 3사 모두와 편성을 놓고 협상을 벌였으며, 그 중에 성공한 곳이 KBS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본방 일주일 후 OCN을 통해 재방송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지상파와 케이블PP들 상대로 한 협상의 결과였다. 가정이란 헛된 것이지만, 만일 당시 종편이 이미 개국한 상태였고 <아이리스>가 지상파 모두로부터 협상을 거절당하여 종편과 계약을 맺었다면 어땠을까. 달라진 플랫폼과 제작환경을 고려한다면 종편에 대한 정치적 비판과 종편 제작에 참여하는 독립 제작사에 대한 평가- 특히 콘텐츠에 대한 평가 -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종편의 시청률이 0.4%대라는 혈중알콜농도 수준에 머물고 있기에 “안티종편” 운동의 필요성조차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현재 종편의 외주파행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중요해 진다. 영향력도 미미한 종편이기에 그런 일방적 계약파기가 가능하다는 판단은 그보다는 조금 덜한 지상파의 외주 관행을 ‘차악’으로 인정하거나, 심하면 면죄부를 주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번 독립제작사협회에서 밝힌 “계약도 없이 제작을 먼저 하게 하는 행위”, “제작비의 일방적 삭감과 수시 편성 변경”, “협찬금 운영 및 분배의 불공정 행위”, “보장 없는 편성기간” 등은 그 수행방식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한국 방송산업의 외주환경에서 빈번한 일들이 아니었던가.

최종목표, 종편 소멸?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오늘날 문화 콘텐츠의 발전은 다양한 행위와 그 행위결과의 부단한 연속을 보장함으로써 더욱 촉진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외주 관행은 제작 행위의 결과물인 콘텐츠의 소유권을 다양한 방식으로 독점하면서 잉여가치를 실현하는 자본 재생산 방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자본의 전형을 창출한 당사자, 그래서 적어도 한국 방송산업 내 계급관계를 형성한 장본인이 지금의 지상파 방송사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공영과 같은 소유구조의 형태와 상관없이 이미 한국의 미디어는 자본화의 경로를 걷고 있었고, 종편은 단지 그 미약한 자본력의 외연으로 인해 미디어 자본화의 현실을 드러내주었다고 본다면 과도한 진단일까.

안티종편 운동의 최종 목표가 “종편의 소멸”이라면, 지금처럼 외주제작의 실패를 보며 조롱을 보내거나 팔짱을 끼고 있는 시선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방관은 결국 종편의 소멸이라는 잠정적인 정치적 목표를 달성할 수는 있을지언정, 방송산업 전반의 콘텐츠 제작환경과 가속화되는 자본화 논리에는 눈을 감는 꼴이기 때문이다. 최근 MBC, KBS를 비롯한 연속된 언론사들의 파업 여파를 보는 심정은 그래서 또한 양가적이다.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오래된 과제는 아직 풀리지 않았고, 그 미완의 과제는 언제나 다른 과제보다 우선시 되어왔다. 그 다른 과제 중 독립 제작사와의 관계는 흔히 갑과 을의 봉건적 위계질서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외주제작의 문제를 콘텐츠 생산의 행위와 행위 결과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디어의 자본화이자 계급 권력의 구축으로 본다면, 이러한 “자발적 자본화”에 대한 저항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가압류까지 들어오는 어려운 지금의 상황에서 이런 요구는 무리이거나 현장을 모르는 비현실적 주장이란 핀잔을 들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안티 종편을 비롯한 정권교체 투쟁의 기본이 헤게모니 투쟁이라면, 동의와 설득의 획득 이전에 우선되는 과제는 자신의 조합주의적 이익이 연대할 타인들의 이익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과정에 있다. 싸워 쟁취해 내야 할 것은 명확하다. 하지만 연대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나누어야 할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초유의 언론사 파업이 ‘승리적’으로 마무리 된다면, 그 승리의 결과는 정상으로의 복귀인가 더 나은 진보인가. 어떤 것이 더 현실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