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자들 : 2012년 9월 한국 언론이 만들어 준 시나리오 한 편

S# 1 경찰 브리핑 룸

인과관계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사실이다. 기자의 추론이라고 해도 경찰의 브리핑에서 언급된 내용이다. 성폭행범이 평소에 일본 아동 포르노를 즐겨보았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 음란물을 보고 모든 이들이 성폭행의 충동을 느끼지는 않겠지만…’이란 추론은 기자로서 해서는 안 될 가치판단이며 명료한 문장도 아니다. 기자는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킬 이런 사건에 대한 보도는 주관의 개입보다 사실의 전달과 또 다른 범죄의 예방에 더 큰 목적을 두어야 한다고 말이다. 포르노와 성폭행 사이의 완전한 인과관계가 없다 해도 포르노를 보는 남성 중에 분명히 “그런 놈”들이 있을지 모른다. 아무렇지도 않게 킬킬대며 음담패설을 떠드는 이들 중에는 내 눈 앞의 성폭행범 같은 “그런 놈들”이 있을 것이다. 경각심이 필요하다. 나 역시 포르노를 보았지만 저런 미친 짓까지는 결코 상상도 하지 않았다. 어딘가에 있을 그런 놈들로부터 시민들은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기자의 사명이자 미디어의 순기능이다. 나는 이성적이며,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하는 기자다.

S# 2 어느 아파트 가정집 거실

“이번 사건의 용의자인 ○○씨는 평소 일본 아동 포르노를 즐겨 보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뉴스를 보던 김씨는 기자의 이 한 마디가 영 마음에 걸렸다. 자신도 어릴 적 친구들과 종로 세운상가에서 구해 온 ‘빨간책’이나 ‘문화 비디오’ 따위를 본적이 있지만 요즘 애들은 모르는 거다. 십대들의 성폭행도 어느새 부쩍 늘어나지 않았나. 벌써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된 아이들이 떠올랐다. 우리 애들이야 학교와 학원으로 바쁘고 집에 있는 컴퓨터도 내가 같이 쓰는 걸 알고 있으니 그럴 일은 없다. 대학까지 나온 내가 키운 아이들은 저런 사이코패스에 변태성욕자가 될 리는 없다. 문제는 다른 놈들이다. 학교 어딘가에, 우리 동네 어딘가에 “그런 놈들”이 있을지 모른다. 작은 방에서 포르노를 혼자 보며 온갖 음란한 상상을 하고 실제로 해 보고 싶어 못 견뎌 하는 “그런 놈들”말이다. 이성은 간 데 없고 모니터에 보이는 모든 것을 현실과 착각하는 놈들. 나나 우리 애들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얼마나 돈을 들여보낸 학교와 학원인가. 어딘가에 있을 “그런 놈들”이야 말로 제대로 교육도 못 받은 실업자이거나 PC 게임에 중독된 무능력한 놈일 것이다.

나는, 우리 애들은 그렇지 않다. “그런 놈들”이 문제다. 하지만 그런 놈들이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옆집의 최씨가 그랬지. 저런 놈들에게 무슨 인권이냐고, 얼굴 가리지 말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최씨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다. “그런 놈들”이 내 주변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놈들은 당연히 얼굴이 만천하에 공개되어야 하고, 포르노 따위를 다운받는 놈들은 모두 잡아들여야 한다. 없어져야 할 놈들, 사형도 상관없다. 포르노에 놀아나는 멍청한 놈들, 무능력자, 정신병자… 그런 놈들 말이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냉정해져야 한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저런 흥분에 휩싸이지 않는 “정상적인” 내가 되어야 한다. 마침 선거철이다. 나와 같이 이성적이며 정상적인, 그리고 단호한 후보를 국민들은 원하고 있을 것이다.

S# 3 선거대책본부

인권침해, 과도한 공권력 남용, 감시사회… 뭐라고 해도 상관없다. 분명히 지금은 저런 성폭력범으로부터 이 사회와 시민들을 지켜야 할 때다. 역시 인터넷이 문제다. 인터넷 실명제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야말로 이런 현실을 모르는 고매한 법관들의 모임이 아니던가. 뉴스에 나온 저런 성폭행범 같은 “그런 놈들”은 당연히 엄벌에 처해야 한다. 이건 보수나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CCTV는 더 많이 곳곳에 설치되어야 하고 불심검문도 필요하다. 사생활 침해라 해도, 독재의 유산이라 해도 현실을 모르는 소리다. 서울 곳곳, 변두리 반지하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그런 놈들”로부터 선량한 시민들을 지키는 일은 가장 중요한 국가와 정부의 역할이다. 경제가 어렵고 실업자들이 늘어나는 지금이 바로 강력한 리더쉽과 엄정한 공권력의 집행을 통해 “그런 놈들”을 발본색원해야 할 때다. 남미와 같은 곳에서도 늘 문제는 불안한 치안이 아니던가. 오늘 저녁 뉴스에서 또 다른 성폭행범의 검거 소식이 들려온다. “그런 놈들”은 분명히 있다. 포르노, PC게임, 술에 중독된 무능력하고 이성을 놓아버린, 미디어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놈들 말이다. 내가 정권을 잡아야만 한다. 인권이라는 미명으로, 감시사회라는 먹물들의 평론에 휘둘려 위험을 방치하는 이들에게 정권을 넘길 수는 없다. 이런 내가 왜 보수이며 독재의 옹호자인가. 나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며 공정하다.

S# 4 TV 뉴스 화면

치열했던 선거가 끝났다. 적어도 선거 기간 동안에 TV와 신문에서는 “그런 놈들”이 등장하지 않았다. 선거는 “그런 놈들”로부터 선량한 시민을 보호하는 일이야 말로 자신의 사명임을 부르짖던 후보가 당선되었다. 다시 한 번 장밋빛 미래가 펼쳐졌다. 당선 후 몇 달이 지났다. 불심검문과 사형제 실시를 밀어붙인 공권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몇 달 간 잡아들인 인터넷 포르노 업로더들 때문이었을까? 포르노에 중독된 “그런 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다. 분명히 어딘가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보이지 않는지도 모른다. 여기저기 뉴스 채널을 돌리고 인터넷 포털 뉴스를 뒤적여 본다. 어딘가 있을 것이다. 어딘가…

Synchronization

포르노, PC 게임, 술에 중독되지 않은, 그 끔직한 범죄와 우발적인 충동 따위는 통제할 수 있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중독된 것은 따로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기자들, 그 뉴스를 보고 용의자 얼굴공개와 사형제를 부르짖던 사람들, 어떤 강력한 수단을 써서라도 선량한 시민들을 보호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사명임을 믿어 의심치 않던 사람 모두 중독된 것은 바로 “그런 놈들”이었다. 보이지도 않고 찾아내기도 힘든 그런 놈들, 하지만 분명히 어딘가 다시 튀어나올 그런 놈들, 바로 그런 놈들이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2012년 8월과 9월 TV뉴스와 신문들이 중독의 시작이었다. 객관적이며 중립적이었던 기자와 충분한 교육을 받고 멀쩡한 정신을 가진 시민, 그리고 진보와 보수를 넘어 사회를 지키려 했던 바로 그런 아주 정상적인 사람들이 바로 중독자들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을 중독자라 하지 않았다. “모두가 중독되었지만,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